2009년 11월 04일
주거 문제
열살이 되던 무렵부터 부모님의 사업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창 성장하고 있던 대전 둔산동의 아파트로 당당히 이사를 가고, 이내 다른 아파트를 구입했다던 우리 집은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위로 순식간에 그야말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이사.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 빨간 딱지. 서울로의 도피. 더부살이를 하는 주제에 살이 한달 사이에 10kg이나 쪘다. 철이 없었다. 겨우내 츄리닝 한벌과 오리털 파카로 서울 구석진 학교를 다녔다. 그로부터 15년간, 우리 집은 우리 집이 아니라 남의 집이었다.
중학교에 살던 집은 은평구의 한 산동네였다. 버스에서 내려 10여분을 걸어야 했는데, 가파른 언덕 끝에 반지하 두칸 방이 있었다.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창문을 열고 지내기가 어려웠다. 에어컨 따위 살 엄두를 못내던 집에서 안방을 차지한 냉장고를 원망했다. 밤에는 집에서 나와 도로에 앉았다. 여름, 집을 싸고 도는 도로 하수관을 정비한다며 공사를 했고 외갓집을 다녀온 우리 가족은 온통 물바다가 된 집안꼴에 경악했다.
살림은 차츰 나아졌다. 고등학교 때 세칸 방과 거실과 주방을 갖춘 반지하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차츰 주거가 안정되어갔고, 안심하고 공부를 했다. 월세에서 전세로. 서울 생활 5년만에 이룬 승격이었으나 그 전세값을 치르기 위해 돈을 빌렸다고 한다. 빌린 돈으로 집을 빌렸다. 나아진 살림에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했다. 대학에 입학할 즈음 반지하를 탈출했다. 동대문구의 한 주택 2층에 전세를 내었다. 그러나 열심히 돈을 모으며 살던 부모님의 가게는 조류독감과 지하철 6호선 공사로 된서리를 맞고, 대학 등록금에 허리가 휘었다. 그저 전세가 우리의 팔자구나,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집이 우리 집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것은 이사를 가야 하는 때였다. 서울에서 15년을 사는 동안, 네 채의 집을 거쳤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전역을 정확히 24일 앞둔 날에 이사왔다. 박정희 정권 시절 만들어진 낡은 빌라. 통일되지 않은 동선과 불균일한 구조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형성하는 이 집은 그야말로 천혜의 교통의 요지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값이 무척 쌌다. 나의 방은 1년 단 하루도 해가 들지 않았다. 아침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방에서 눅눅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또 2007년으로부터 햇수로 3년이 되었다.
이사를 간다. 전세금을 빼고 모아둔 돈을 합쳐, 아득바득 실입주금을 만들어내서 집을 계약했다.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집이 아니라, 나의 명의로 된 나의 집이다. 40대에 무주택자가 된 부모님께서 사업부도의 여파로 아직까지 신용이 불량하기 때문에, 말끔한 신용을 지닌 나의 명의가 필요한 까닭도 있지만, 이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의 가정이고 나의 집이다. 성인이 되어 직장을 얻어내고, 매달 꼬박꼬박 이자와 원리금을 상환해야 할 주된 몫이 나에게 남았다. 27세에 처음으로 가지게 된, 아마도 35살 까지는 융자금을 갚아야 하는 나를 위해 부모님은 오랫동안, 혹은 영영 <나의 집>을 포기하였다.
술을 줄여야 한다. 돈을 아껴야 한다. 만남에 쪼잔해야 하고 씀씀이에 지랄같아야 한다. 남의 집 생활이 천형으로 남겨진 부모님과, 무거운 짐을 지게 된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고 시집을 가는 누나를 위해 나는 나의 집에, 앞으로의 주거와 생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사를 가는 날, 우리는 참으로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린 끝에 우리 집을 갖는 것이고 우리는 그 집에서 오랫동안 행복해야 할 터이다.
집은 무척이나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 by | 2009/11/04 23:48 | 『도심소요道心逍遙』 | 트랙백 | 덧글(2)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