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02일
축의금 잡상
군대가 그렇듯 집안사람 사이에도 짬이란 게 있고, 짬이 비릴 때와 차츰 퍼져나갈 때 해야 할 일도 달라진다. 이제 드디어 나는 세배를 받을 수 있는 짬이 되었고, 세뱃돈을 뜯기며 맏조카의 나이어림을 부러워하는 기분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면서, 내 나잇값을 할 수 있도록 인정받고, 요구를 받는 그런 문턱을 작년즈음부터 넘은 셈인데, 그 중에 또 대표적인 일이 축의금 받기이다.
친-외 양가가 모두 6형제 이상 가는 대가족인데다가, 좌우 양가에서 모두 막내 언저리이다 보니(이를 테면 아버지가 자그마치 8남매의 막내이고, 난 그 집의 막내.) 지금 내 나이, 형제들은 그야말로 줄줄이 사탕으로 결혼을 해 나가는데, 친누나의 결혼식이 다음 달이고 사촌누나의 결혼식이 다음 주. 일년에 서너명씩이 결혼을 해 나가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아주, 젊은, 촉망받는, 잘나가는, 축의금접수원이 되었다.
축의금 접수는 고된 일이다. 결혼식 시작하기 한시간 전에 도착해서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결혼식 기념촬영도 접어두고 눈 코 뜰 사이를 더듬어 가며 돈을 세고 번호를 매기고 이름을 적고 식권을 사람 수에 따라 나누어 주는 일을 두사람이 해야 한다. 간혹은 식권을 나눠주는 일을, 한 사람이 따로 할 때도 있지만 우선은 내 위에 즐비한 친척 형님들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두는 건 감히 안될 일이다. 두사람이서 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봉투는 두 손으로, 집안 어른들께는 일어나서 인사를 하며 받아야 하고 재빠르게 인원을 알아내 식권을 내어드린다. 빠르게 앉아 봉투에 순번을 매기고, 돈을 센 뒤에 봉투의 한쪽 끝에 순번과 금액을 적는다. 돈은 접수대 서랍에 잘 넣어둔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은 여기까지다.
다른 한 사람은 봉투를 받아 치부책(축의금 장부)에 화객의 이름과 액수를 순번과 함께 쓴다. 치부책은, 나이 많은 어른들께서 보시는 것이므로 글씨를 잘 쓸수록 좋고 금액을 한자로 적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친척들 사이에서 잘난 조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치부책 정리는 주로 연장자가 하는데, 나는 돈을 세는 일을 주로 하다가 올해 한번 해 볼 기회가 있었다. 애써서 잘 쓴다고 쓴 건데, 못 봐줄 글씨가 나왔다.
대략 두시간 반 정도면, 축의금 받는 일이 종료된다. 한 숨 놓고 쉬면서는, 이제 들어온 돈을 세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통산 전적 3전 무자책을 기록하고 있지만, 만원 한장 비기라도 하면 정말 숨막힐 거란 생각에 돈을 세고 또 센다. 그걸 다 센다고 또 끝은 아니다. 예식 절차가 모두 끝나서 피로연장에 결혼하는 부부와 그 부모님들까지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쯤이 되어야 식권이 전부 소비되기 때문이며, 그것을 기다려야 예식장과 정산을 할 수 있으므로, 그 시점까지 돈을 보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쇼핑백 하나에, 천만원을 넘나드는 거액을 담아 들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때쯤 되면 다른 친척들이 식사를 마치고 편안히 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봉투를 맡기도 밥을 열심히 먹고 나서, 혼주와 함께 예식장 비용을 정산하면 끝.
이 일을 몇번 하고 나니, 축의금이란 게 왜 민감한가도 알 수 있게 되고, 나 자신이 찾아가야 할 결혼식 그러지 말아야 할 결혼식을 분간할 수 있게 되고, 전체 결혼비용이란 것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게 되니 얻은 것이 결코 적지 않다. 이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비록 내가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되기까진 퍽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훨씬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쌍의 부부가 새로이 태어나는 인륜지대사의 현장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담긴 돈 봉투를 받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다. 글씨를 아주 잘 쓰시는 나의 사촌형님을 본받아 앞으로는, 한자로 치부책에 금액을 적어넣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요량이다.
# by | 2009/11/02 15:15 | 『도심소요道心逍遙』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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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막연하게 복잡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복잡한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찾아갈 결혼식과 찾아가지 않을 결혼식을 분간할수 있게 되었다니 상당히 부럽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스킬을 조금만 알려주실수는 없으신지^^;;
쉽게 말해 우리 집안 경조사에 참여할 사람의 결혼식이라면 가서 물심양면 돕는 것이고, 그럴 일이 없는 관계-예를 들어, 별로 오래 다닐 생각이 없는 직장의, 그다지 가깝지 않은 동료의 결혼식이라면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뭐 기본적으론 이 정도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