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의금 잡상

군대가 그렇듯 집안사람 사이에도 짬이란 게 있고, 짬이 비릴 때와 차츰 퍼져나갈 때 해야 할 일도 달라진다. 이제 드디어 나는 세배를 받을 수 있는 짬이 되었고, 세뱃돈을 뜯기며 맏조카의 나이어림을 부러워하는 기분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면서, 내 나잇값을 할 수 있도록 인정받고, 요구를 받는 그런 문턱을 작년즈음부터 넘은 셈인데, 그 중에 또 대표적인 일이 축의금 받기이다.

친-외 양가가 모두 6형제 이상 가는 대가족인데다가, 좌우 양가에서 모두 막내 언저리이다 보니(이를 테면 아버지가 자그마치 8남매의 막내이고, 난 그 집의 막내.) 지금 내 나이, 형제들은 그야말로 줄줄이 사탕으로 결혼을 해 나가는데, 친누나의 결혼식이 다음 달이고 사촌누나의 결혼식이 다음 주. 일년에 서너명씩이 결혼을 해 나가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아주, 젊은, 촉망받는, 잘나가는, 축의금접수원이 되었다.

축의금 접수는 고된 일이다. 결혼식 시작하기 한시간 전에 도착해서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결혼식 기념촬영도 접어두고 눈 코 뜰 사이를 더듬어 가며 돈을 세고 번호를 매기고 이름을 적고 식권을 사람 수에 따라 나누어 주는 일을 두사람이 해야 한다. 간혹은 식권을 나눠주는 일을, 한 사람이 따로 할 때도 있지만 우선은 내 위에 즐비한 친척 형님들께서 그 일을 하시도록 두는 건 감히 안될 일이다. 두사람이서 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봉투는 두 손으로, 집안 어른들께는 일어나서 인사를 하며 받아야 하고 재빠르게 인원을 알아내 식권을 내어드린다. 빠르게 앉아 봉투에 순번을 매기고, 돈을 센 뒤에 봉투의 한쪽 끝에 순번과 금액을 적는다. 돈은 접수대 서랍에 잘 넣어둔다. 한 사람이 하는 일은 여기까지다.

다른 한 사람은 봉투를 받아 치부책(축의금 장부)에 화객의 이름과 액수를 순번과 함께 쓴다. 치부책은, 나이 많은 어른들께서 보시는 것이므로 글씨를 잘 쓸수록 좋고 금액을 한자로 적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친척들 사이에서 잘난 조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치부책 정리는 주로 연장자가 하는데, 나는 돈을 세는 일을 주로 하다가 올해 한번 해 볼 기회가 있었다. 애써서 잘 쓴다고 쓴 건데, 못 봐줄 글씨가 나왔다.

대략 두시간 반 정도면, 축의금 받는 일이 종료된다. 한 숨 놓고 쉬면서는, 이제 들어온 돈을 세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통산 전적 3전 무자책을 기록하고 있지만, 만원 한장 비기라도 하면 정말 숨막힐 거란 생각에 돈을 세고 또 센다. 그걸 다 센다고 또 끝은 아니다. 예식 절차가 모두 끝나서 피로연장에 결혼하는 부부와 그 부모님들까지 등장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쯤이 되어야 식권이 전부 소비되기 때문이며, 그것을 기다려야 예식장과 정산을 할 수 있으므로, 그 시점까지 돈을 보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쇼핑백 하나에, 천만원을 넘나드는 거액을 담아 들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때쯤 되면 다른 친척들이 식사를 마치고 편안히 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봉투를 맡기도 밥을 열심히 먹고 나서, 혼주와 함께 예식장 비용을 정산하면 끝.

이 일을 몇번 하고 나니, 축의금이란 게 왜 민감한가도 알 수 있게 되고, 나 자신이 찾아가야 할 결혼식 그러지 말아야 할 결혼식을 분간할 수 있게 되고, 전체 결혼비용이란 것도 대략은 짐작할 수 있게 되니 얻은 것이 결코 적지 않다. 이 경험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비록 내가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되기까진 퍽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훨씬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쌍의 부부가 새로이 태어나는 인륜지대사의 현장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담긴 돈 봉투를 받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다. 글씨를 아주 잘 쓰시는 나의 사촌형님을 본받아 앞으로는, 한자로 치부책에 금액을 적어넣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요량이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공존共存 | 2009/11/02 15:15 | 『도심소요道心逍遙』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arexi.egloos.com/tb/246834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카린트세이 at 2009/11/02 16:21
제 아는 분께서는 그래서 축의금 계산에 복식부기법(....)을 이용하신다고도 하시더군요.....

뭐랄까.. 막연하게 복잡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렇게까지 복잡한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찾아갈 결혼식과 찾아가지 않을 결혼식을 분간할수 있게 되었다니 상당히 부럽기도 합니다. 저에게도 스킬을 조금만 알려주실수는 없으신지^^;;
Commented by 공존共存 at 2009/11/02 17:50
결혼식 축의금은 본질적으로 결혼하는 자녀들의 부모님께서 그간 다른 결혼식에 찾아가서 낸 축의금과 장례식에 찾아가서 낸 부조금을 회수하는, 전체적으로는 집단 대 집단 사이에 돈을 모아주고, 다시 돌려받는 품앗이의 성격이 강합니다. 이걸 참조하시면 될 것 같아요. ㅎㅎㅎ

쉽게 말해 우리 집안 경조사에 참여할 사람의 결혼식이라면 가서 물심양면 돕는 것이고, 그럴 일이 없는 관계-예를 들어, 별로 오래 다닐 생각이 없는 직장의, 그다지 가깝지 않은 동료의 결혼식이라면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뭐 기본적으론 이 정도입니다. ㅎㅎ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