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혁신이라는 가치

김영삼이 당선되었던 14대 대통령 선거 당시, 그의 당선을 결정지은 것은 군사정권 종식이라는 외면적 가치, 내재적으로는 영남카르텔의 정당성 확립이라는 가치였다. 군사정권의 강고한 탄압으로 인한 반 DJ 정서와 그로 인해 반등된 전라도 정서. 이런 복잡한 요인들이 추가될 수 있겠으나 김영삼 후보가 당시,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선택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저러한 가치를 선거에서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임기 초반 군사정권 종식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성과를 냈다. 이후 무너져가는 경제정책과 재앙에 가까운 남북정책/외교정책으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되지만 중요한 점은 정권획득의 과정에서 하나의 정파가, 어떤 가치를 국민에게 내보일 수 있는가이다. 김영삼 당선에 비하면, 15대 대통령 선거는 좀 찌질했다. 김대중 후보가 내세울 수 있는 가치가 사실 별로 없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것은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 뒤 형성된 담론이지, 선거를 지배하는 가치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경제위기로 인한 김영삼정권에 대한 비토여론 속에서 떠오른 이회창의 선풍적 인기, 아들의 병역면제에 대한 의구심과 구설수로 인한 추락, 거기에 영남표를 잠식한, 이후 불멸의 이인제라는 칭호를 얻을 남자의 활약이 김대중 후보를 승리자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하다.

다시 노무현, 16대 선거는 새 시대 새 정치라는 가치가 선거를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전략이 전반적으로 포퓰리즘적이었다는 약점은 있지만, 노무현 후보가 10년을 넘게 쌓아올린 정치이력과, 그가 만들어낸 가치. 그것은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김대중 정권의 낮은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깃발을 들고 선거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그는 새 정치라는 가치에 걸맞게 그 분야에 광범위한 업적을 남겼으나, 경제실정과 지지층 이탈로 힘든 임기를 보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김대중-노무현 10년간 누적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충격은 17대 대통령 선거를 몰가치적 풍조로 몰아갔고 유권자들은 이명박이 내건 경기부양에 호응해 그에게 정권을 위임한다.

간단하게 지난 4건의 선거를 일별해 볼 때, 김영삼과 노무현은 미래 가치를 유권자가 선택한 전망적 투표로 당선되었다고 볼 수 있고, 김대중과 이명박은 전임자의 실정으로 인한 회고적 투표로 당선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을 이른바 10년 주기설이라거나, 그런 문맥으로 엮는 것은 좀 허망할 터이고 다만, 앞으로의 선거에서는 과연 회고적 투표가 대세를 이룰 것인가 전망적 투표, 즉 정치적 가치가 우선하는 선거가 될 것인가는 여당과 야당 공히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전망적 투표가 이루어진 14대와 16대 대선 모두 당선자가 여당의 후보였다는 점인데, 결국 전임자가 결정적인 실책을 하지 않는 한, 여당의 후보가 대선에서 어느정도의 프리미엄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를 국민들에게 품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다가올 선거에서 예를 들어 박근혜라는 브랜드는 다분히 불안정적이다. 박근혜가 내세울 수 있는 가치는 외환위기 이래로 몇번이고 반복되어 온 박정희여 다시한번 시리즈의 결정판인데, 사실 지금 박근혜의 대세론이라는 것이 김대중 정권 시절 이회창 대세론보다 나을 것도 딱히 없기도 하고, 박근혜가 쌓아 온 정치 이력 속에서 그놈의 "원칙"과 "대전은요?" 말고 어떤 가치를 내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재보선에서 민심이반이 입증되었고, 내년 지방선거 이후엔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차기 선거에서 박근혜가 여당의 후보로서 지지층을 확보하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가 문제다. 회고적 투표라 할지라도 이명박의 경기부양브랜드에 비견할만한, 한나라당에 비교우위를 가진 정치적 자산과 가치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소 쌩뚱맞지만, 미래 과제의 하나로 사법부 독립, 혹은 혁신의 가치를 야당들이 숙고해 보면 어떨까 싶다.

이명박 정부에서 3권분립의 틀은 무너져가고 있다. 신영철 대법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국회는 거수기당의 위력시위장이 되어버렸다. 행정부는 세금을 퍼나르며 탈법행정을 벌이는데 그것을 감시하고 막아야 할 제 4부, 언론은 미디어법의 헌재 판결과 함께 더 큰 위기에 처해 있다. 국가 시스템의 합리성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강압수사. 용산 참사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사법부의 행동. 검찰청장 후보자들의 비리전시와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을 보고 있노라면 최근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사법부에 대한 극심한 불신감은 이명박 정부가 대오각성하지 않는 한, 향후 더욱 심각해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에게 조롱과 조소의 대상이 되는 사법부의 현실을, 하루 빨리 혁신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다.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에 근거한, 또한 시민의 참여권이 수반되는 사법부 혁신이 미래에 유의미한 가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정권의 임기가 3년 이상 남아있고. 그 사이에 또 무슨 일이 터질까 조마조마한 다이나믹코리아의 하루하루이지만 야당들이 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서 부디 다음 선거에, 하나의 정책으로 이룩될 수 있다면 시민들은 자신의 투표권을 활용하는 기쁨을 한가지 더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당장 나라도, 합리적인 사법부 혁신정책을 내놓는 정당에 투표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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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共存 | 2009/10/30 11:35 | 『co-existenc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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