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9월 29일
자유
최인훈의 <광장>이 지니는 무거운 함의는 주인공 명준이 서로 다른 두 체제를 살았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 고뇌하고 선망하며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또 제 3국을 택함으로써 <광장>의 서사를 일구어 나가기 때문이다. 그의 좌절과 죽음은 어느 곳에서도 안주하지 못하는 체제 부적응자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광기와 야만의 시기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가벼이 다루어지는지를 다소나마 감지해 볼 뿐이다.
명준은 체제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사실상 인간 사회는 그야말로 풀뿌리 단계의 조직부터 넓게는 국가, 국제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체제의 다층적 연속이며, 인간의 권리와 품격이란 체제의 역학관계들을 통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즉, 체제란 우리에게 당위이고 필수인데, 대부분은 태생적으로 결정되며 그 최고의 단계는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집단에의 소속은 인간 본연의 욕구 중 하나이며, 국가가 부계 가부장사회의 유물로써 출발하긴 하였으되 국가 수준의 권력이 없이는 인간 사회를 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자 그런데 우리의 체제에 적응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동성애자 체제에 속한 이성애자라면? 이슬람 사회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대부분의 국가는 이러한 경우에 개인이 살고 싶은 체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으나 사실 그것을 실현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체제 선택의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역만리의 새 모국에서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익혀 간다는 것은 꽤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곳에서 일굴 새로운 삶이 과연 이전의 체제에서보다 행복할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박재범의 예를 통해서 보듯이.
체제를 선택할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이전을 실천하지 못하는 상황. 체제는 종종 이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자행한다. 국가를 위해 군대라는 이름으로 조직화된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 젊은 남성들이나, 직장에 만연한 성폭력을 참아내는 여성들의 노력은 체제를 택할 수 없는 개인의 비극, 명준의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만약 체제 이전의 권리를 보다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면? 이른바 시장주의적 관점에서 개인이 체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고 할 때, 체제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개인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도록 노력할 것이다.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나, 사실 이미 우리는 체제를 불신임하고 그를 통해 체제로부터 더 많은 권리를 얻어내는 것을 이미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불철주야 아이 좀 많이 나으라고 노래를 부르는, 출산 장려정책이 있지 않은가?
살고 싶은 체제를 선택할 권리가 늘어날수록, 개인의 삶이 더 나아지리란 점은 자명하다. 혼란스러운 신자유주의의 격랑 속에서 온갖 스트레스를 받느니 저마다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자신이 살고 싶은 체제의 근사치를 찾아보는 것은 민족과 국가라는 거대한 체제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방향성을 고민해 보고, 국가 이전에 인간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미래가 조금은 달라질지 모르겠다.
***외대학보에 <나비의 반란>이란 제호로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모음. 몇일 전에 쓴 글인 <광장, 박재범>의 서론부를 정리했다. 체제-개인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려다 보니 꽤 긴 호흡의 글이 되었는데, 이부분만 따로 떼어 고치면서 보니 원래 글은 영 엉망이다. 글을 다시 좀 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
# by | 2009/09/29 11:44 | 『나비의반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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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체제가 과연 자기 사람들을 기르는것을 어디까지 용인해야하나 싶기도 하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