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집에 오자마자 맥주를 꺼내었다. 아버지의 일용할 약주를 일언반구 없이 마셔버리고자, 유리잔에 가득 담았다. 투명한 유리잔에 가득 담긴 흐뭇한 알코올의 기운은 오늘 하루 예비군 훈련에 지친 나를 달래줄 터이었다. 4월 8일 수요일. 2년차 예비군 훈련이었다. 훈련장은 경기도 남양주시. 버스를 타고 오고 가며 아침에는 경기도 교육감이 누구일까 의구했고 저녁에는 진보적 교육감이 당선되었다는 낭보를 들었다. 200cc가량의 맥주에 내 얼굴은 온통 붉어졌다.

운동을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5분을 뛰고 다시 5분을 걷는 인터벌 트레이닝이 본래의 습관인데 통, 달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걷고 싶다. 기분이 무척 좋았던 것은, 예비군 훈련과 반가운 사람과의 저녁식사로 유쾌하게 하루를 보낸 다음이었기 때문이며. 너무나 말끔한 날씨 그리고 밤 거리를 점점히 지키는 꽃들 덕이었으리라. 주섬주섬 열쇠와 핸드폰, MP3플레이어를 들고 집을 나왔다. 골목을 벗어나면 홍제천, 개천을 따라 주욱 늘어선 개나리가 반긴다.

밤공기는 서늘했으나 물 흐르는 소리와 드문드문 길을 채운 사람들의 인적으로 홍제천 길은 푸근한 감성을 일으킨다. 길을 따라, 배드민턴을 치는 부녀, 손을 잡고 걷는 모자, 열심히 살을 빼는 일가족들이 늘어서 있다. 그들을 꽃들이 비추어 주고 머리 위에서 도시의 차량은 바람을 거스르며 달린다. 그 길을 따라 걷던 시선이 그대로, 안산에 멎었다. 밝다. 산 한가운데에 종으로 길게 빛의 길이 나 있다. 나는 지금까지 매일같이 봐 온 그 풍경을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쳐온 어리석음과, 적당한 알콜, 적당한 흥분, 적당한 날씨가 만들어낸 달뜬 마음에 뒤섞여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흐드러진 벚꽃이 인공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걷기로 마음 먹고 나온 길이었기에 알 수 있었겠지, 개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초롱이 나를 오솔길로 이끈다. 한강물을 끌어올려 개천을 메우고 산으로 물을 끌어올려 인공폭포를 만든 홍제천의 이 풍경을 나는 회의한다. 언젠가는 교정되어야 할 터. 그러나 가뿐한 마음에, 불필요한 감상은 덜어내고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오른다. 초롱은 점점. 도심의 산이라 풀내음은 찾기 힘들었다. 여전히 등 뒤에는 내부순환로의 고가를 가스연기가 가득 채우고 있다. 길을 따라 물은 졸졸. 이것은 인공의 것이냐 자연의 것이냐. 물음하며 쉬이 중턱에 올랐다. 낮은 산이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살기 좋은.

터지지 않은채 몸을 사리고 있는 꽃망울들은 유난히 붉다. 붉고 흰 벚꽃들을 인공의 등이 다시 비추고 있다. 푸르고 파아란 불들이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 올리면 우람한 가지에서 뻗어나온 꽃들이 하늘을 덮어 흡사 빛의 터널, 꽃의 터널을 만든다. 이곳의 벚나무들은 크고 장성하다. 낮고 작은 안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벚꽃 중에서도 귀한 수양벚꽃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 맥주가 먹고싶어졌다. 수양벚꽃은 한국의 특산종이다.

홍제와 안산에 둘러싸인 이곳에서는 산 중턱이라 해도 보이는 것이 많지 않다. 보이는 것은 온통, 좁은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사람사는 동네의 냄새이다. 화려하지 않고 거창하지 않은 아파트와 집들이 길게 도시의 밤을 물들이고 있다. 한 계절을 힘겨이 보내고 다시 한 계절을 힘겨이 맞이하는 서울의 사람들은, 여기에 서서 흐드러지는 벚꽃을 보며 어떤 위안을 얻을까. 누구에게 위안을 줄 수는 없을지라도. 

걷는다. 벚꽃을 따라 평편한 산길을 위로 아래로 오르는 것은 수고롭지 않았다. 서늘한 밤 공기도 이곳에 올라서는 조용히 잦아들었다. 개천길을 따라서는 사람은 걷고, 꽃길을 따라서는 사람은 머무른다. 또다시, 모여 앉은 일가족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소란스럽지 않은 동네의 산길에 소슬소슬 인적을 남긴다. 산 속을 닦아 낸 길은 인공의 것이다. 꽃을 보기 위해 길을 내야 하는 역설에 얼마나 많은 길이 그 위에서 뭉게어졌을까. 그 위에 꽃잎이 내려앉았다. 터지지 않은 꽃망울을 비웃듯 가볍게 생을 마감하는 꽃이다.

길은 주택가에서 다시 주택가로, 산과 맞닿아 있다. 거창하지 않은 동네의 거창하지 않은 풍경. 때때로 쉽게 부서져 버리는 그것이 그저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봄. 밤은 깊고 멀다. 나는 학보에 보낼 원고를 편집하느라 늦게까지 자지 못했다.


장중한 전반부와 빈약한 본론. 마음에 드는 글이 아니다.

by 공존共存 | 2009/04/09 21:00 | 『도심소요道心逍遙』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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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멀더 at 2009/04/10 18:33
ㅇ_ㅇ읽어보니 별로 ㅋㅋ
Commented by 공존共存 at 2009/04/10 22:27
ㅇㅇ 좀 의무감으로 쓴 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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