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01일
소중화의 그림자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다룬다. 명・청 교체기, 임진왜란의 혼란을 겨우 수습해 나가던 조선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그대로 광해군은 쇠락한 제국 명과, 신흥 강국 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시도했고, 사대부들의 명분론에 떠밀려 실각한다. 병자호란은 그렇게 시작된다.
조선의 중신들은 탄핵과 비방을 반복하며 이상적인 정치논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합리적인 철학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명분론으로 내세워진 중화주의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판을 치던 조선이 병자호란을 맞은 것은 어찌하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지만, 삼전도의 치욕을 맛본 뒤에도 사대부들의 이 정신병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범이 없어지니 그를 따르던 여우가 범의 위세를 빌린다고 조선은 소중화를 자처한다. 중화의 주인인 명이 사라지고 청이 득세했으니 중화의 법통을 이은 조선이 바로 중화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며 조선이 자폐적 증상을 보이던 그 때, 일본은 활발히 유럽과 교류하며 완연히 조선의 국력을 앞질러 나갔고 청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왕조의 터전을 닦아 나간다. 그리고 이후의 역사도,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미국이 전례 없는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라지만 그 여파는 대공황 때의 그것보다 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미국의 상황이다.
신자유주의는 달러화의 고삐를 풀어 미국으로 하여금, 첨단의 금융산업을 발달케 했다. 금융산업은 돈 놓고 돈 먹기, 가진 자의 불로소득을 불러왔다. 그런 반면에 실물경제에는 파탄을 초래했다. 연방 재정적자 460조원, 세계 최고 수준의 지니계수를 자랑하는 미국 경제가 국제사회에서 가질 수 있었던 영향력이라는 것은, 정직히 말해 기축통화인 달러의 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지되어 온 것이다.
원인이 명확하고 전망이 뚜렷하다. 오래전부터 논의되어 온, 미국의 경제실패가 지금 그 대가를 한꺼번에 치르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가 구축해 놓은 금융시스템을 거칠게 표현하자면, ‘투자에 대한 투자의 무한궤도’이다. 금융거래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을 가지고 파생상품을 만들어 거품을 부풀리는 신자유주의식 금융시스템. 그것이 지금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해 사망 선고를 맞았다. 사라진 중화처럼, 한 때 찬란한 번영을 구가하던 미국식의 경제시스템이 갈 곳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탈규제와 감세, 민영화의 담론에 압도되어 있다. 자유주의를 교조처럼 신봉하는 관료집단과 기득권층이 미국식 경제모델로 우리 사회를 몰아가는 모양새다. 다른 대책이 없다. 미국이 몸소 실패를 증명해 보인 그 시스템을 끝끝내 밀어붙인다. 그저 잘 될 것이라고만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기부양에만 핏대를 올린다.
그들을 보면서, 사라진 왕조의 사대부들을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눈앞의 권력에 급급해 온 국민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그들은 300여년 전의 소중화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미국의 국민들조차 우리를 비웃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멀고 먼 고난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외대학보에 "나비의 반란"이라는 제명으로 연재하고 있는 칼럼을 모음. 다소 강경한 논조라서 학교측의 압력이 있지 않을까 했으나 별다른 건 없었다.
# by | 2008/10/01 00:51 | 『나비의반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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