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4월 30일
휴가 나오는 길.
1.
어느곳에서나 버스시간에 맞춘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일요일, 휴가신고를 받아준 당직사관의 "빨리 뛰어가면 차 타겠네."라는 말에 헐레벌떡, 두 손에 한 짐씩 든 채로 뛰어갔는데 버스는 오지 않는다. 첫 차는 7시 30분, 여섯발자국 정도 거리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쉰 줄을 넘긴 듯한 아저씨가 있다. 이 정도가 적당한 거리인가보다. 짐을 내려놓고, 차비를 고르고, 일주일간은 맡지 못할 차가운 공기를 깊이 들이마쉬는 사이에 7분이 지났다. 지루하다. 기다리기에는 7분은 아무래도 짧은 시간은 아닌모양이다. 누구나가, 4박 5일이 4.5초라는데.
"왜 이리 늦어 임마 7분 늦었어." "아 일요일이 잖아요." 버스엔 아무도 없다. 첫 손님은 운전기사에게, 길에 버린 7분을 살갑게 쏟아냈고 기사는 넉살좋게 웃으며 받는다. 대략 45분거리를, 하루에 열 두어번 왕복하는 버스는 주얼주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모씨의 군대이야기, 모씨의 수입이야기. 앉자마자 책을 폈는데 창 밖으로 풀의 관능이 이른 아침의 햇살에 아우성이다. 너그러워지도록 하자. 막 움을 트기 시작한 산골의 초록과 아침의 서정을 지금 내가 무엇과 바꿀 것인가. 수다를 떨 목적인지 아니면 내 마음과 맞아떨어지기라도 한 것인지, 버스는 느리게 느리게 언덕을 오른다.
남으로부터의 소식이 구비구비 산을 돌고돌아 양구 그 꼭대기까지 올라오기에는 아직 이른 모양. 봄은 영글지 않았다. 무채색의 산들이 무채색의 목조지붕과 어우러지고,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풋것들은 쳐다보기만 해도 여리기 그지없다. 그 사이사이 보이는 빈 논. 열흘쯤이 지나면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할 것이고 그로부터 몇일이 더 지나면 논에는 다시 연둣빛의 새것들이 아장아장 자라나고 있으리라. 산 등성이를 가르고 갈라 경작하는 계단식 논 너머로, 이른 아침을 맞는 농민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인다. 5월을 맞는 마음이 분주할 것이다. 8시. 햇살이 어느새 눈부시게 차오른다. 구릉과 분지를 가득 채우는 온기를 맞으며 멀리서, 허리를 펴는 모습이 보인다.
유월에 접어들어서야, 산 위에는 들국화가 만개한다. 고지이다 보니 관목들은 자라나기 힘든 모양. 그리고 이즈음에, 다시 말해 4월에, 봄에 휴가를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자연 그대로의 봄님들을 보는 것이 2년만이다. 떠나오기 전에도 부대 안에 심어진 벚꽃이 바람에 흐드러지는 것을 보고 스산하면서 기쁜 마음이었지만, 느릿느릿 이동하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진달래와 산매화를 보는 것은 마치 봄의 주인이라도 되는 기분이 아닌가. 산 속의 꽃들은 교태가 없다. 자연과 맞닿은 그네들의 생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그들이 그 긴 겨울을 이기고 피운 꽃은 오롯이 승리자의 영광. 개나리는 산 속에 살지 못한다. 진달래며 철쭉이며 산매화는 골짜기로 등성이로 오르고 올라 태양을 향하는데, 개나리는 산 속에 없고 도로변에 조림되어 진달래와 산매화가 갖지 못한 풍성함을 뽐낼 뿐. 잎사귀를 거느리지 못하는 그들이 위태해보인다. 그러고보면 산매화며 개나리며 진달래가 모두, 각자의 생김새가 연약하기 그지없다. 겨우내 아끼고 아낀 양기를 꽃에 실어내는데, 꽃이 소담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리고 봄의 태양이 가득해지면서는 정작 떨어지고 마는 그네들이다. 미련없는 꽃의 한살이. 누구나가 이렇게 자신의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면 좋으련만은.
아, 목련이다.
"아저씨 만원짜리인데요 거스를 수 있어요?" "아 양구 나가서 바꾸면 되니까 일단 타." 인심도 좋다. 겨우 산속길을 벗어나서 아마도, 말년 휴가를 떠나는 듯한 두사람이 탄다. 도시에서는 차비 천원에 싸움도 나고 뉴스에도 나는데 이런 시원시원함이 그래도 시골에서 사는 맛인가싶다. 그러고보니 처음 버스에 같이 탄 아저씨. 반말로 말을 걸었다. 나에게 시간을 물어보며. 시골살림은 아마도 넘겨짚음으로 근거삼는 것이 아닐런지. 낯선 사람이지만 아들같다는 넘겨짚음. 잔돈을 준비하지 못했고 또 양구에서 돈을 거스르든 어디에서 거스르든 속 편한 일은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넘겨짚음. 경계를 훌쩍훌쩍 넘어서는 그들의 큰 걸음에 의심이란 우스운 일이다. 아무려면 어떠냐......모로 가도 집으로만 향하면 될 일이지.
2.
참지 못하고 마침내 한겨레에서 눈을 떼었다. 버스가 바뀌었고 길은 넓어지고 좁아지고 있다. 새로 닦았다는 고속도로가 산을 하나 만나더니 그대로 구절양장이 되었다. 편히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해도 넘어가기 쉽지 않은 길을, 시사지의 자그마한 글자를 읽어넘기며 갔으니 오죽할까. 길은 춘천을 향해 접어들고 있었다. 멀리 아파트촌이 보이고, 교각이 보이지만 그에 닿기 전에 어지간한 나도 두통으로 쓰러질 판이었다. 오기까지도, 호수를 건너고 구불구불한 길을 몇개나 지나는 사이에 무채색의 산은 녹음이 되어 있었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는 아직 겨울 옷을 입고 다니는 판에, 춘천에만 와도 벌써 여름이 되어 있는 모양이다. 연둣빛 새싹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개나리는 모두 지고 철쭉은 가득 잎사귀를 껴안고 있다.
주간지는 세상과 나의 결절을 힘겹게 메우고 있었다. 다가오는 대선이며 대기업 회장의 폭행사건, 김훈이 새로 썼다는 소설이며로 내 짧은 호흡을 가능케하건만은, 두려움은 물러나지 않는다. 딱 한달이 남았고, 보름을 밖에서 보름을 안에서 보내야 한다. 그 사이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일은, 춘천의 평야지대로 접어들면서 다시 세상과 만난다. 이지러지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논과 밭이 맵시 좋은 과수원과 함께 늘어진 이 평화로움, 그 사이로 강이 달리고 강의 한 말단과 또하나의 말단을 도시와 농촌이 대치하고 있다. 이것을 단지 지키는 것만에도 얼마나 많은 외로움과 괴로움이 소용되는가.
평야라기보단 구릉이다. 마치 넓찍한 주발 여럿을 마구 엎어놓은 것 같다. 춘천변의 도로는 줄곧 이런 모양으로 농촌을 끼고 있다. 배꽃이 한창. 그러고보니 마침 배꽃에 접붙일 때다. 이때가 한창 봄이다. 하얗고 하얀 배꽃과 붉고 흰 복사꽃이 어우러진 야트마한 언덕 위에 꼭 예쁘게 지어진 집이 있다. 고속도로에 딱 달라붙어 있다는 것만 아니라면, 더없이 살기 좋은 모양새다. 집이 원래 그 곳에 있었을지 도로가 먼저 있었을지. 길은 산과 언덕을 단절하여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 무엇을 택하여야 하는가. 사람의 행위는 사람을 위하여야 할 것인가.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방식을 택해야 하며, 자연을 위해서라며는 무엇을 또 택해야 하는가. 동물인가, 식물인가. 이미 물질사회의 오독을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우리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하나의 거악이 아닐까. 적어도 한 아프리카 중에서도, 기차를 타고 다섯시간쯤은 들어가야 당도할 수 있는 농촌이 아니고서는.
길이 가까워지는 만큼 나의 마음도 바빠진다. 무엇보다도, 차에서 우선 내려 기지개를 크게 켜야만 한다. 크게, 켜야 짧은 여행 동안 마음에 피어오른 것들이 갈무리될 것이고, 크게, 켜야 마음 속에 움친 것들도 한번 토해낼 수 있으리라. 재시작. 무섭기도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다가서가면서 또, 나를 찾아가야 할 것이니.
# by | 2007/04/30 07:35 | 『도심소요道心逍遙』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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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담하면서도 서술만으로 느껴지지 않는 묘사력은 뭘 먹으면 얻어지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