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최근에 읽은 가장 인상적인 글의 일말은, <샘터>에 연재되고 있는 최인호씨의 에세이 <가족>에서의, 그의 독서관과 작가론이다. 현재 우리가 가진 가장 정력적이며 대중적인 작가의 한 사람인 그는 책 한권을 쓰기 위해서는 수십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며 가로되, 얼마전에 연재를 마친 <유림>을 위해 서재의 책상이 수십권의 유가경전과 유학자들의 관련서적으로 덮였다며 다음에는 기독교를 주제로 글을 써 볼 요량이라며 그때엔 또 수십권의 기독교에 대한 책이 자신의 책상에 오르게 될 것임을 기꺼워한다.

글을 쓴다는 일이 이렇게나 무거운 일임은, 물론 진즉에 알았지만 업과 같은 자신의, 작가로서의 숙명을 그토록 흥겹고 자랑스레 말하는 최인호씨의 글을 읽고 나는 나의 젊은 날의 척박한 독서가 문득 부끄러워졌다. 남아수독오거서. 만화책으로 따진다면야 수레로 열개도 채우고 남았겠다만.

따지고 본다면 그렇다. 한줄 읽고 쓴 글은 기껏해야 한줄짜리의 가치밖에는 지니지 못할 터이고, 한권을 읽고 쓴 글은 적어도 한권의 가치는 지니게 될 것인데 수십수백권의 책을 읽고 이루어 낸 한개의 저작은 떠 얼마의 가치를 지니고 얼마의 사람과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그 문제에 대한 도전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지금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자체가 허세가 될 일이란 말이다.

정직하게 말하고 자시고도 없지만, 누가봐도 나의 독서량은 참담한 수준이다. 고등학교때까지는 만화와 가벼운 소설류와 친했고 대학에 와서는 인터넷과 친했고, 물론  TV와는 평생토록 별로 친해 본 일은 없어서 다행이긴 하다만 어찌어찌 스물다섯이나 된 지금에 와서는. 돌이켜 어떤 책이 의미 있었고 어떤 책이 와 닿았는지. 길게는 도무지 말할 수가 없다. 그래 그 <유림>에서는, 철학 사변만으로 조선시대의 긴 긴 밤이 어둑하지 않았을 것인데.

근래에 민경민군과 주고 받은 편지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편지 말미에 "책이 모든 것은 아니더라"라는 그의 말에 문득 떠오른 생각의 조각이 있어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책 속에 길이 있고 삶 속에 빛이 있다"는 말을 써 보냈다. 군인의 입장으로 주어진 현실이 참으로 좁고 그리하여 이러쿵 저러쿵 좌충우돌을,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하고 있는 것인데.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나의 말 속에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멀고 먼 길을 헤메이며 왔다는 것인지.

그러니까 나는, 지금, 쓰고 있는 만큼의 읽어온 책과 글에 대해 철저하고 도전하고 철저히 무너지고, 철저히 비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블로그라는,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여 발하는 나의 초심이니, 어떤 삶의 빛이 앞으로 나를 유혹할 것인지. 준비는 지겹도록 하고 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사람을 돌아볼 작정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왔다. 또 하나의 약속을 부수며.

by 공존 | 2007/04/01 11:58 | 『co-existence』 | 트랙백 | 핑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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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ielcide at 2007/04/01 12:49
그대의 얼음집에 첫번째 리플을 달게된걸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미약한 시작에서 언젠가 삶의 빛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원함.
천객만래.
Commented by rak at 2007/04/01 14:25
이하동문.
주옥같은 선배의 말씀,
깊이새기게.
Commented by 멀더 at 2007/04/15 13:28
그니까 스타할시가네 책좀읽고 그러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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