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bye, Mr Trouble.

Good-bye Mr. Trouble.

 이야기는 내가 19살이던 2001년에 시작된다. 그 시절의 나는, 혼자서는 <창룔전>과 <은하영웅전설>, <1984/동물농장> 등을 읽으며, 학교의 독서토론동아리에서는 <멋진신세계>, <걸리버여행기>, <손석춘의 여론읽기의 혁명> 등을 잡탕으로 읽어대던 부모님 말 잘 듣던 보수적인 정치성을 가진 청소년이었다. 아침에 밥을 먹으며 아버지는 김대중 정권을 욕하셨고, 어머니는 이회창을 퍽 좋아하셔 그만큼 그를 칭차하셨다. 나는 그 말이 모두 옳다 믿었다. 

 부모님 입장에서 아들이 보수에서 진보로 ‘변절’해버린 사건이 그 해의 언론사 세무조사였다. 김대중 정권은 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진행했고. 조중동은 말 그대로 “난리를 피웠다.” 신문이 나오지 않던 일요일에 특별판이랍시고 <독자와의 대화> 지면을 간행해 정권을 욕해댔고, 언론탄압이다 정권의 음모다 사설과 보도면을 총동원해 저항했다. 

 그러나 나는 조중동의 그러한 반발이 대단히 혐오스러웠다. 그 때 내가 가진 지극히 당연한 상식은, “주권자의 힘은 세금을 통한 정부운영에서 나온다”였기 때문이었다. 세금조사는 단순히 세금을 똑바로 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고, 기업이 감추어야 할 재무재표가 있다면 비리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언론이, 국가의 공기라고 일컬어지는 신문사가 왜 세무조사에 반발을 하고, 추징금을 떼이는가?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언론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고, 조중동에 대한 명확한 비판적 관점(물론 이 사건만이 아니라, 당대의 여러 정치적 대소사에 조중동은 늘 암적 존재였고, 그 또한 나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을 갖게 되었다.

 2002년 노무현이 나타났다. 나는 그를 잘 몰랐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꽤 유능했던지, 장관직 사임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공무원 정서를 전하는 동향기사로 그를 처음으로 인지하게 된 정도다(그나마도 지금은 그 기사를 언제 보았는지 시기를 명확히 하지 못한다. 장관직 사임이 총선 때문인지, 대통령 경선 때문인지도.). 그런데 그가 이인제의 대항마가 되고, 갑자기 신문지면에 “바보 노무현”이란 말이 회자되고, 노란손수건과 돼지저금통으로 선거에 시민참여의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 2002년 겨울, 내가 대학 입학이냐 재수의 길을 택하느냐의 갈림길 속에서 생생하게 전달되어왔다. 

 그 절정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라는 외침이었다. 조중동은 노무현에 대한 비토를 계속했다. 장인의 좌익 경력을 트집잡아 색깔론을 입히는 파렴치함은, 아비가 아들에게 권력과 함께 신문사를 대물림해주는 파렴치함을 넘어선 것으로 나에게는 보였다. 나는 조중동을 싫어했다. 몹시 싫어했다. 그런만큼 조중동이 싫어하는 노무현에게 눈길이 갔다.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다. 인권변호사 경력. 바보 노무현의 분골쇄신. 대학생이 되고, 여전히 아침마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던 그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는 애오라지 이회창만을 바라보셨고, 이미 정치의식이 성숙해진 나는 부모님과 말다툼을 하던 일이 잦아졌다. 

 내 인생의 굵직한 사건들이 노무현의 성공과 고난, 죽음의 시기에 겹쳐 발생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다. 그러나 스무살 새내기 시절, 월드컵과 함께 2002년 대선을 가슴졸이며 지켜본 기억. 김제로 농촌활동을 가 한-칠레 FTA와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 교양과 토론을 하고 선전활동을 하던 기억, 스물 두 살에 과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한지 두달만에 탄핵 사태가 벌어져, 무거운 마음으로 새내기들을 이끌고 시위에 나가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서던 기억은, 나로 하여금 그를 놓아줄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그리고 그 뒤에도, 나는 강원도 양구 GOP 초소에 앉아 남북 철도 시범개통을 지켜보았다. 제대 후 사무직 알바를 하며 밤 새 인터넷을 검색해 10.04 남북정상회담을 복기하고 미래를 꿈꿨다. 내가 그에 대해 실망하든, 여전히 사랑하든지 간에...대통령 노무현은 나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10년이 지났다. 노무현이 탄핵되던 날 만세를 부르며 껑충껑충 뛰시던 아버지는, 그의 죽음에는 아무런 말을 보태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밥을 먹으며 묵묵히 뉴스를 지켜보았다. 무슨 말을 한달 말인가. 이미 수개월간 이명박 정권이 세운 장벽에, 기자들이란 간수에게 목줄을 졸려있던 사람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실패, 아니 패배했고 이명박 정권은 들어섰다. 이명박이 끝내 노무현을 죽이고 말 간악한 사람이었다는 것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바였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씁쓸히 패배했다. 그리고 26살부터 35살 때까지,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의 길고 긴 수렁은 내 청춘의 어두운 터널을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취업과 비정규직의 굴레를 건너며 나는 가난했고, 마음 둘 곳 없이 세상은 고통스러웠다. 화면에선 이명박이 번들거리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인터넷 공간은 일베가 장악한 것처럼 보였다. 내 모교에서는 강의실에서 일베 인증을 하겠다며 학부생이 PT에 노무현 조롱 합성사진을 올렸다가 학교가 뒤집어지는 꼴이 생겼다. 

 이따금 노무현의 행적을 담은 영상, 영화, 뉴스가 미디어에 번져들어가는 것을 본다. 비록 그의 죽음으로 인해 폐족되었던 참여정부계 정치인들에게 회생의 길이 열리고 결국 문재인 대통령이 민주당을 혁신하고 새 정부를 열었지만, 슬픈 일일 뿐이다. 사라진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그저 견뎌낼 만큼의 고통이다. 그 슬픔, 신해철은 애통해하다가 같이 이명박에 의해 숨통이 조여졌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고, 고통받았다. 

 내 열아홉과 스물에 처음 만난 노무현이라는 사람.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의, 스물 일곱에 떠난 사람. 성인으로 자리를 잡고 내 터울을 마련할 그 10년 간, 처음엔 칼바람 부는 겨울 같았고 지금은 폭염의 열탕 같은 삶의 한 장 한 장에 내내 미안한과 아픔을 준 사람. 그는 고인이 되었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광주처럼 빨치산처럼 저주로 남은 그 이름 노무현.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는, 떠난 이를 기억할 수 있는 감정과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기억의 공동체다. 노무현을 죽인 사람들은, 그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기억의 공동체의 탄생에 대해서, 여전히 저주만을 반복하고 있을까. 

Good-bye, Mr Trouble. 

진보정치의 소실과 어느 샐러리맨의 죽음

1. 태초에 "문빠"가 있었다. 한겨레21 1163호의 해명기사 자료. 한겨레는 대선주자들을 순차적으로 표지모델로 게재하기로 기획했으며, 마찬가지로 안철수 당시 후보 역시 문재인 후보와 같이 표지모델로 죽 배치되지 않았다고 해명했으나,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마주보고 있는 표지 이미지는 안철수 후보가 주장하고 있던 양자구도에 대한 밀어주기... » 내용보기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형태

기예모로 델 토로가 헐리우드에 진출한 초기의 명작 <판의 미로>를 연상하게 하는 영화. 그러나 스페인내전의 비극 속에서 한 소녀의 꿈과 삶이 산산히 부서지는 과정을 담으면서 관객에게 고통을 전염시켰던, 혹은 완전한 부활을 이루면서 혼란에 빠트렸던 <판의 미로>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에, 델 토로 감독 고유의 생생한... » 내용보기

만평 대란 터진 김에 복습

그때 시사인 편집장이 4과문을 빙자해 엿을 먹였지.어? 암찰스가? 정의의 강타자?! » 내용보기

뭐 ㅇㅅㅇ이 ㅇㅅㅇ한 것뿐이긴 한데

오로지 근거 없는 증오심만으로 이딴 걸 해놓으니까 4과문까지 써보네...그동안은 잘도?문제는, 한겨레 시사인 한 짓이 이거랑 별반 다르지가 않단 거고.  » 내용보기